8월의 기록이야기 : 광복,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작성일
2020-08-03 17:18:15
작성자
경상남도기록원
조회수 :
668
8월의 기록이야기 : 광복,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그날이 오면”이란 말로 시작하는 문장을 듣는다면 우리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취직준비생은 합격의 그날, 업무에 지친 직장인은 여름휴가를 떠올릴 수 있겠죠.
젊은 문학가 심훈에게 그날은, 우리나라의 광복이었습니다.
그날이 되면 새가 되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겠다고 표현할 만큼
광복은 강렬한 기다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올해는 광복 75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었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그대로입니다.
8월의 기록이야기에서는 광복절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1945년 해방 당시 거리의 모습(국가기록원 소장)


1965년 8월 15일 경상남도청의 제20주년 광복절 기념식(경상남도 소장)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종전 선언이 방송되었지만
여전히 매일신보에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며
유언비어와 동포 상잔(相殘)을 경계하라는 일본총독의 당부가 실렸습니다.
당시 경성 방송국 취재 기자로 일하던 문제안은 8월 15일을 아래와 같이 기억했습니다.

“사람들이 독립이 되었다는 사실, 일본이 망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건 그날 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일본 천황의 방송이 몇 번 되풀이되었지요.…(중략)…
그렇게 하니까 16일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어요.…(중략)…
누가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전부 길거리로 나왔어요.”


  8월 16일에는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었습니다.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파냐 샤브쉬나는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로 가
석방자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 썼습니다.
 
 “나는 석방된 사람들이 무슨 일로 감옥살이를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지금 이 순간 그 질문이 얼마나 부적합한가 하나는 사실을 느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바로 오늘과 같은 해방의 날을 맞으려다 그렇게 되었지요.’
연설과 노래, 눈물, 포옹 이 모든 것들이 한 데 어우러졌다.”


  광복의 기쁨은 노래로도 이어졌습니다.
윤인구 선생님이 작사하고 금수현 선생님이 작곡한 ‘8월 15일’이란 노래는
해방 직후 부산, 울산, 경남지역에 널리 불렸습니다.

“삼천만 가슴엔 눈물이 샘솟고 삼천리강산엔 새봄이 오던 날
아 동무여 그날을 잊으랴
우리의 생명을 약속한 그날을 8월 15일 8월 15일“


  이 노래는 1950년 ‘광복절 노래’가 공식 지정곡이 될 때까지
부산, 경남지역에서 각종 행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광복의 감격은 깊었지만 이후 3년간 우리는 미군정 시기와 좌·우의 사상대립 등 격동의 시기를 겪게 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광복을 맞이합니다.
  광복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빛(光)을 되찾는(復)’다는 뜻이지만,
우리민족에게는 나라를 되찾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국가가 있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復)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1949년 10월 10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명명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49년 10월 10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 공포의 건(국가기록원 소장)


1995년 제50주년 광복절 중앙 경축행사 기본계획안(국가기록원 소장)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가기록원
       KBS 광복 60주년 특별 프로젝트 [편], 『8·15의 기억 :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 2005.
       파냐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1996.
       연합뉴스, "해방 직후부터 불렀던 노래 '8월 15일'을 아시나요", 2015. 8. 11.